[2017.10.24-29]임선희 개인전 “ The Private Jour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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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임선희 개인전 “ The Private Journals”
전시일정: 2017.10.24-10.29
전시장소: 팔레드서울1F

색으로 폭발하는 원초적 감정

 

이선영(미술평론가)

 

2010년 ‘Portraiture Suite’ 전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임선희의 전시는 급격하게 스타일이 바뀌어 있다. 원초적 감성과 함께 폭발하는 색채와 액션은 이전 전시의 신비와 우수로 가득했던 여성 초상을 파열시킨다. 파열의 흔적들은 캔버스를 주체도 대상도 아닌 모호한 상태로 변모시킨다. 처절하게 깨지고 있는 삶을 봉합하려 애썼던 자화상들에 이미 잠재해 잇던 이런저런 틈들이 터져버린 형국이다. 이번 전시에는 이전처럼 정성껏 구축된 피그말리온 같은 제2의 창조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고통 받는 나르시스는 상실된 자기의 영상을 발견하며, 관객은 온전한 개체가 아니라 상처받고 피 흘리는 누군가를 보게 된다. 작가는 스스로에게 동종요법을 행한다. 이러한 잔혹함이 스스로를 분석하려는 통찰력과 결합되지 않았다면, 작품이란 단지 배설 이상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상실감은 극소로의 환원이 아닌, 극대의 확산을 향한다.

색채의 향연 위에 씌여진 은유적 문장들은 향기나 소리처럼 공감각적으로 확장된다. 감각간의 상호적 교환을 위해 각 언어의 안정성은 포기되었다. 특히 시각적 명료성이 희생되었다. 색의 미묘한 조화를 염두에 둔 조형적 계산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면에서 거칠 것 없이 밀고 나간다. 유일한 한계는 좁은 작업공간을 반영하는 작품 크기이다. 이런저런 좁은 입지에 제한된 현실과 달리, 이렇게 과감하게 저지를 수 있는 사건성에 예술의 카타르시스가 있다. 소외된 일상의 노동과 차이가 없는 ‘꼼꼼한’ 그림에 감탄하는 이들은 노동의 숭고함과 인내력만을 높이 평가할 뿐이다. 그것조차도 환금성이 없으면 무시당한다. 이번 전시에서 임선희는 노동보다는 감정의 밀도와 강도에 치중한다. 감정도, 그것을 받아 쓸 예술도 불확실하다는 위험은 있지만, 작가는 성실보다는 진실의 편에 선다. 확정된 무언가를 추후에 재현(그리고 그것을 약하게 변형시킨 ‘표현’)할 뿐인 노동(그리고 그것의 한 지류인 개념)은 예술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예술에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그런 것도 하나의 기준이 되어 시장의 든든한 블루칩이 된 적도 있다. 세계에 유례없는 고학력의 문화적 교양으로 무장한 대중들이 성장했어도, 형태나 개념이 모호한 작품은 여전히 인기가 없다. 점점 많은 이들의 운명이 된 불확실성의 팽배가 역으로 문화예술에 있어서의 확실한 오락성과 장식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관객이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는 불어로 쓰여 진 문장들이나 비교적 분명한 상징성이 있는 오브제들뿐이다. 중간에 잘린 글과 오브제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나머지 반쪽들을 채우기를 요구한다. 반복된 해석에 의해 짜 맞춰질 것을 기대하는 깨진 상징들은 작품 읽기의 최소한의 참조 점일 뿐, 작품의 몸통을 이루는 것은 자유분방하게 칠해진 물감의 흔적들이다. 관객 앞에 놓인 화면 한가운데의 형상은 시각적 관습상 얼굴에 해당함을 염두에 둘 때, 이번 전시의 추상적 화면 역시 자신의 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자신의 모습이라는 연속성을 가지지만, 같은 작가가 그렸나 싶을 정도로 이전 전시와 스타일의 차이는 크다. 그것은 단지 기분전환이나 형식의 실험을 넘어서는 어떤 절박한 변화의 증후이다. 이러한 ‘자화상’의 변화에서 상처의 고통은 더욱 깊어짐을 알 수 있다. 고름처럼 질펀하게 터져버린 흔적들은 희열마저 느껴진다. 이 희열은 죽음과 삶의 관계처럼, 깊은 슬픔과 기쁨이 공존한다. 글자와 오브제들이 가세한 얼룩진 색들은 은유적이며 정념에 물들어있다. 이번 전시는 자신을 완전히 까발리려는 듯 보다 직접적이고 강렬하다. 캔버스와 작가 사이를 매개하는 붓이라는 그 최소한의 매개도 벗어 던진다. 맨발로 춤을 추듯이, 작가는 화면에 직접 촉수를 갖다 댄다. 손톱, 손가락, 손바닥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정체 모를 형상들은 작가가 어릴 때 했던 무용과도 다를 바 없는 행위의 발산이다. 작품에 자아를 그대로 쏟아내는 방식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지만, 예술을 삶의 잉여나 여흥, 또는 장식이 아니라 삶을 정수로 체험하려는 이들은 가장 주관적인 것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을 건져 올리곤 한다.

작가가 경험한 아픔, 기쁨, 슬픔이 모두 기록된 비망록과도 같은 작품들에 내재된 감정은 전염되고 공유될 것이다. 임선희의 작품에 상처(trauma)처럼 벌어진 흔적들은 태초의 완벽함인 모체에서 분리된 모든 인간이 처한 운명이며, 인생에 있어 비극적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회귀하는 원초적 반응이다. 작품에 나타나는 반창고나 깨진 석고인형은 상처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다. 깨진 인형들이 붙여진 작품에는 태양, 사랑, 은신처 같은 단어들이 적혀있다. 화면 가득히 잡힌 캡슐의 실루엣은 항 우울제와 수면제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푸른색, 하얀색 알약은 알아볼 사람은 알아본다. 그 약들은 마약처럼 불안정한 심신을 일시적으로나마 가라앉혀준다. 작품 여기저기에 벌어져 있는 상처는 작가가 아직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점과 상당부분 연관된 듯하다. 그 상처들은 곧장 사랑의 문제와 연결된다. 작고 귀여운 발레슈즈 색(샌들 레드)으로 칠한 작은 사각형에 ‘사랑해’라고 적혀진 작품은 사랑의 일시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 일시적인 것을 지속적으로 고정시키기에는 그것이 너무 취약해 보인다. 소녀나 사랑이나 환상 속에서만 그 온전함을 보존할 것이다.

카뮈의 산문시 [결혼]에 나오는 문장이 적힌 작품에서 하늘색 바탕에 떠 있는 회색은 작가의 결혼에 대한 어두운 생각과 달리, 밝게 표현되어 있다. 왼손으로 마구 비벼댄 무채색 덩어리는 역설적으로 환멸을 경감시킨다. 기쁨을 표현한 작품 역시 그 반대의 정조가 포함되어 있다. ‘두 성간의 달콤하고도 비극적인 긴장’(크리스테바)인 사랑은 모순 그 자체로 다가온다.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문장이 들어간 작품에는 사랑과 결혼,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같은 양가의 감정이 문장뿐 아니라, 색으로도 표현된다. 뭔가 빼곡히 적혀있고 그려있는 낡은 수첩들은 상징성은 물론 시청각적으로 율동감이 두드러진 작품 속 불어 문장들의 기원이 된다. 화면에는 단어 한두 개, 또는 전면에 걸쳐 문장들이 적혀 있다. 이미지의 말없음을 배반하는 글들은 수다를 떠는 듯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쇄도하는 수다 속에 침묵을 은폐하는 듯하다. 상처받은 자들은 할 말이 많지만, 온전히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상처가 회복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미지로 모자라 덧붙인 글, 또는 글로부터 출발한 이미지는 그 어느 것도 자족적이지는 않고 서로를 보충한다. 보는 것만큼이나 말하기 또한 억압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작품 속 단어와 문장들은 사랑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화면 속에 적힌 글자들은 작가와 작품 간에 이루어진 사랑의 대화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의 대화는 긴장이자 향락이고, 반복이자 무한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주술이다. 노래하는 대화, 기도이다. 사랑의 주체로서의 화자는 수신자와의 관계에서 계속 실종된다. 여기에서 내면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상적 삶에 잠시 괄호 친 후 자기만의 은신처에서 작업에 몰두하는 여성 작가에서 섬 같은 이미지가 발견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엘도라도’라는 글자가 씌여진 작품에서 망망대해 같은 공간에 고립된 형상의 방향을 달리해보면 여성의 성이 연상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비너스상이나 성모상은 여성상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은유적으로 변형된다. 깊은 감정의 상태는 모든 형상을 거부하는 숭고로 귀결된다. 터키 블루와 화이트를 섞어서 하늘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무한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나 작은 정방형 색 면들을 조합하여 색채의 대조를 실험한 작품들이 그러하다.

여러 번 색을 올려서 색들이 서로 얽혀 새로운 조화를 이룬다. 특히 회색과 어우러지는 색들이 아름답다. 화면 속에서 직접 섞이는 생생한 색채는 비극적 가사가 담긴 경쾌한 선율 같은 묘한 울림이 있다. 임선희의 작품은 작업은 홀로 하는 것이지만, 긍정적/부정적 의미에서 작업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은 타자들이라는 점을 예시한다. 언어로 이루어진 사회 속에 진입하면서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정과 사랑에 대한 욕망’(라깡)이 작품 속 보이지 않는 드라마를 연출한다. 이 심리 드라마는 대체로 비극적이다. 자아와 타자, 상상과 상징 사이의 괴리는 메워지기 힘들며, 이 괴리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작품은 시작된다. 개념보다는 행위, 형태보다는 색채, 의식보다는 무의식이 앞서는 임선희의 작품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충동을 담는 그릇이다. 그림이라는 그릇은 말해지기 힘든 것, 표현 불가능한 것, 불확실한 과정이자 위기이자 도약을 담는다. ‘표상불가능 한 것은 기호들의 기반’(크리스테바)이 된다.

작품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 또는 자신이 상실한 것을 찾아나서는 맹목적 여정이다. 임선희의 그림은 시각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감각의 촉수가 뻗치는 복합적인 장이다. 그러한 탐색의 와중에 상상적 자아와 상징적 주체는 원초적 현실인 실 재계로 녹아 든다. 정체성을 이루는 경계는 위협받고, 자아와 주체는 시험에 붙여진다. 샤먼처럼 그가 지옥을 경유한 여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과 타자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사랑-욕망이 예술-종교와 만나는 지점은 죽음에 가까운 극단의 영역으로부터 살아 돌아온 체험이다. 그 진귀한 체험이 아직까지 작가에 대한 고유의 아우라가 깨지지 않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한 차원(경계)의 이동이 없다면, 자신에 솔직하고 자신에 몰두하는 예술 역시 고만고만한 자기연민이나 탐닉에 머물고 말 것이다. 작가는 사회에서 지배적으로 통용되는 가치의 소통을 넘어서, 금기로 인해 불투명해진 영역까지 탐색하려는 본능이 있다. 그것은 사회의 지배적 상징체계를 무대로 하는 욕망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마단 사럽은 라깡의 해설서에서, 말기로 갈수록 라깡은 욕망보다는 희열(jouissance)을 강조했다고 지적한다. 말하는 주체는 실지로는 금지된 것을 표현하려고 분투하는 무의식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희열과 죽음이다. 라깡에 의하면 희열은 무의식적이며, 고통이 되어버리는 무의식적 쾌락이다. 쾌락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희열은 육체적 고통이 비육체적 쾌락으로 될 때 생겨난다. 희열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그 한계가 극복될 수 없는 어떤 것을 나타낸다. 아름다운 얼굴을 거울처럼 비추는 자화상을 넘어서, 체액 같이 분비된 물감으로 비체의 향연을 벌이는 이번 전시 작품의 정조를 물들이는 것은 단순한 쾌락을 넘어선 희열이다. 희열은 예술과 종교의 기저에 깔려 있으며, 삶 속에서 이에 준하는 체험은 사랑뿐이다. 작가는 상습적으로 사랑 병을 앓는 것이 아니다. 작가란 존재는 사랑하는 자아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에, 예술을 하고 있는 한 그 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랑은 무엇보다 고정된 정체성의 한계를 철폐하는 숭고한 사건이자 위기이다.

현대 심리학과 언어학에서 ‘자신’은 단일한 통일체가 아니라, 여러 영역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사랑은 자기의 경계선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공포와 욕망에 가깝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상징 계(식별될 수 있고 생각될 수 있는 금지된 것), 상상 계(자아가 존속하고 확대되기 위해 스스로를 표상하는 것), 그리고 실재 계(정동이 모든 것을 열망하는 불가능한 영역)를 서로 분리되지 않게 엮어 놓는 것이 바로 사랑의 체험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3계의 융합은 숭고와 비천함, 번뜩이는 영감과 광기를 동시에 유발한다. 여러 계가 중첩되는 시공간 속 감정 역시 복합적이다. 크리스테바는 순간이면서 영원이고, 과거이면서 미래요, 해체된 현재인 그 시간은 나를 충족시키고 나를 파괴해버리지만, 여전히 나를 욕구불만 상태로 남겨 놓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랑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에도 반복된다. 물론 임선희의 작품은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 자체를 다룬다. 거기에는 사랑의 환희만큼이나 그 어두운 면이 두드러진다. 어둠으로 인해 빛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임 선 희 / Sonnie Limm

 

학력

 

1971 서울 생

1994 덕성여자대학교 예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1997 덕성여자대학교 예술대학 동양화과 대학원 졸업.

2015 현재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박사수료

 

개인전

 

2016 “Phantom of Baudelaire” 북유럽문화원. 서울

2014 “Private Journal” 공근혜 갤러리. 서울

2010 “Possession” Gallery DOO. 서울

2010 “Portraiture Suite” artforum SEN(千). 후쿠오카. 일본

2010 “Portraiture Suite” artforum SEN(千). 시모노세키. 일본

2008 “She” 대안공간 팀 프리뷰. 서울.

2001 “Stranded” 문예진흥원미술회관. 서울

1996 “동아미술제 대상 작가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95 “Cemetery Dancer” 인사갤러리. 서울

단체전

 

2017 “ 밀양아리랑미술관 개관기념전, 밀양

2016 “ 싱가폴 아트페어” 싱가폴 아트센터, 싱가폴

“ Singapore Art Faire” Singapore Art Center, Singapore

2016 “ 아트쇼핑 까뤼셀 뒤 루브르” 루브르미술관, 파리

Art Shopping Carrousel du Louvre” Musee du Louvre Paris

2016 “Project 2TAWON” 성우빌딩, 서울

2015 “ Position” 토포하우스, 서울

2013 영화 “군도” 윤종빈 감독 미술작품 제작

2012 영화 “청야” 김재수 감독 미술작품 제작

2011 Wonderful Pictures . 일민미술관. 서울

2009 꽃밭에서. 63스카이아트 미술관. 서울

2009 운현궁 愛. 관훈미술관. 서울

2008 시사회전. 대안공간 팀 프리뷰. 서울

2007 시사회전. 대안공간 팀 프리뷰. 서울

2006 겸재와 함께하는 미술여행. 세종문화회관미술관. 서울

다시 보는 서울. 경향신문미술관. 서울

Pick&Pick . 쌈지스페이스. 서울

2004 동아미술제 초대 작가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봄의 소리전. 세종문화화관미술회관. 서울

아게 홍 기획-초대작가 경매전. 쌈지스페이스. 서울

2003 Charity. 쌈지스페이스. 서울

News on Old Paper. 문화일보갤러리. 서울

La Femme. 세종문화회관. 서울

La Femme. 성원미술관. 홍천

Pick&Pick. 쌈지스페이스. 서울

근맥전. 인사갤러리. 서울

2002 동양화 45인전. 백송화랑. 서울

동아미술제 동우회원전. 일민미술관. 서울

문화일보 재개관 기념 ”길을 가다“. 문화일보갤러리. 서울

Low Teck Slow Motion . 문화일보갤러리. 서울

근맥전 .인사 갤러리. 서울

2001 FILTER 한원미술관. 서울

“不安”. 문예진흥원미술회관. 서울

1999 동아미술제 20주년 동우회원전. 일민미술관. 서울

“익숙함과 익숙하지 않은. 보다갤러리. 서울

덕원전. 덕원미술관. 서울

1998 “숲에서 나오다”. 인사갤러리. 서울

전환기의 한국화 자성과 자각전. 공평아트센터. 서울

1996   국립현대미술관 이전 10주년 기념전

“3대 공모전 대상작가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아시아의 새로운 도약전. 워커힐 미술관. 서울

이외 15여회 단체전.

 

논문

 

1995 “LG 21세기 선발대” 해외탐방연구논문 -Childern’s Art Museum-

1997 人物의 形象을 통한 內面精緖의 象徵的 表現에 관한 硏究 (석사학위 청구논문)

 

수상

 

1995 “LG 21세기 선발대” 해외탐방연구논문 -Childern’s Art Museum-

문화예술부분 대상수상

1994 제 7회 동아미술제 대상 수상, 동아일보사 주최

 

작품소장

 

LADA Motors. 모스크바. 러시아

Singapore Art Center. 싱가폴

Art Forum SEN. 후쿠오카. 일본

한화그룹 사옥. 서울

동아일보사. 서울

프라자 호텔. 서울.

매일유업 사옥. 서울

가천대학교 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