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14-25] 이현권 개인전 (서울, 한강을 걷다 (201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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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이현권 개인전 (서울, 한강을 걷다 (2014~2017))

전시일정: 2017.3.14(Tue) ~ 2017.3.25(Sat) (월요일 휴관)

전시장소: 팔레드서울 1F&2F    

그는 흐르고 있다

차갑고도 뜨거웠다. 처음 그의 한강과 맞닥뜨린 순간 얼음송곳에 꿰뚫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해감을 휘감고 물밑을 헤매던 아이들, 오랫동안 앓았던 이만이 이해할 수 있는 미묘하고 기묘한 아픔이었다.

어둡고 괴로웠던 한때의 일이었다. 흔들림으로 닮은 우리는 허겁지겁 쓰고 허둥지둥 찍었다. 세상의 가파른 자리에서 버티고 견디기 위해 딛고선 발밑을 파 참호를 만들었다. 예술은 대개 그런 것이다. 스스로를 엄호하기 위해 방벽을 축조하고 들어가 숨는다. 세상을 향해 은빛 총알을 쏴 올리는 것은 안전을 확인한 다음의 일이다. 우리는 무모한 겁쟁이였다.

그의 렌즈는 집요하게 물을 향하고 있다. 물은 인간의 심연을 건드리는 고전적인 심상이다. 생명의 본능인 에로스와 죽음의 충동인 타나토스를 동시에 내포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유영하던 외롭고도 자유로운 태아의 기억이다. 문학에서는 신화적 원형으로서 고대가요 ‘공무도하가’에 드러나는 것처럼 사랑이면서 이별이고, 광기이자 이성이며, 이상이면서 현실인데다, 삶이면서 죽음이다. 물은 숨탄것 모두를 살리고 기르며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는 한편 그 끝없는 깊이와 막아 세울 수 없는 압력으로 폐허와 절멸의 공포를 일깨우기도 한다.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모순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실체이기에 물은 곧 거울이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투시해 비춘다. 2010년 처음 세상에 선보인 그의 한강은 환부가 고스란히 드러난 상처였다. 사람들의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강이면서도 사람들로부터 한참 멀리에 있었다. 어둠 속에서 고요히 출렁거리거나, 안개에 묻혀 침잠하거나, 얼어붙은 채 비밀스레 녹아가고 있었다. 물가에 잇닿은 것들은 모두 위태로웠다. 나무는 물의 허구렁을 향해 달려가는 남편을 끝내 잡지 못한 백수광부의 아내처럼 머리를 풀고 앙상하게 서 있었고, 어디로부터 어디까지를 잇는지 알 수 없는 교각은 다만 버티기에 온힘을 다하고 있었고, 달리는 택시에는 누가 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으며, 다리 긴 새와 유람선은 홀로 적막했다.

사진 앞에 선 관람자들의 눈은 아득하고도 집요하게 실제이면서 실제가 아닌 무엇을 어루더듬는다. 나 또한 그렇게 허정거리다가 맥없이 사진에 찍힌 사람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인구 천만의 대도시를 가로지르는 큰물 언저리에 사람들이라곤 고작 낚시하는 무리 대여섯, 혼자 혹은 둘이 낚싯대를 드리운 사공, 그리고 해질 무렵 고수부지에 마주앉은 연인이 전부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둠에 묻힌 채 검은 실루엣으로만 등장했다.

비둘기도, 물고기도, 살아있는 것들이 모두 그랬다. 얼굴이 없는, 감정을 숨긴, 식별할 수 없는 익명이었다. 예술의 독창성은 얼마간의 당혹감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소녀의 순정’이라는 달보드레한 꽃말을 지닌 코스모스마저 눅눅하고 칙칙한 어둠에 휩싸인 채 하늘거리는 풍경은 나를 매우 당황스럽게 했다. 병든 시선, 위험하다기보다 지극히 아픈 응시였다.

각자 삶의 과제를 해결하기에 바빠 한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다시 조우한 2014년 이후의 한강은 사뭇 놀랍고 감격적인 기분마저 느끼게 한다. 예술의 치유적 기능은 창작자의 상처를 객관화해야만 향유자들과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기본 원리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갇힌 틀을 인정하고 틀을 깨고 나와서야 비로소 그 틀을 정확하게 응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이 그는 자신의 한강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때로는 외면하고 싶었을 상처를 끈질기게 붙잡고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던 게다. 여전히 깊은 곳은 얼어붙어 있을지라도 강은 서서히 해빙되고 있으며, 앙상했던 나무는 초록으로 무성해졌고, 아직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은 햇빛 아래 삼삼오오 모여앉아 먹고 마시며 피크닉을 즐기고 있다. 코스모스는 여전히 어둠에 젖어 있지만 강가에 잇닿은 사람의 마을 텃밭에는 꽃과 함께 싱싱한 채소가 자라고 있다.

내면 풍경의 변화에 따라 같은 세계가 이토록 달라졌다. 적막하리만큼 정적이었던 화면이 역동적으로 변화한 것은 작가의 시선이 넓어지고 자유로워졌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리라.

 

흘러간 것은 물이 아니라 흘러간 물이다.

흘러간 물을 통해 흘러갈 물을 만진다.

 

그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박용하의 시 ‘단편들’ 중 일절이 떠오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눈앞에 펼쳐놓기 위해, 그는 부지런히 흘려보냈다. 흘러갔다. 그리고 지금도 흐르는 채로 흘러올 것들을 기다리고 있다.

턱없이 여리나 더없이 강건한 물은 멀리 흐르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앞으로 이어질 이현권의 후속 작업이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다.

김별아(소설가)

한강은 흐른다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한강을 걷는다. 빼곡히 쌓여져 있는 아파트와 콘크리트의 차가움, 그리고 경쟁하듯 올라가는 마천루가 시야에 보인다. 눈에 거슬리는 여러 장면들, 숨이 막힌다. 하지만 스쳐가는 계절의 바람과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나무들의 잎들, 선물로 준 다양한 빛들, 그리고 이러한 수만 가지의 변화에 반응하는 나의 내면들이 저 차가운 건물들을 색으로, 감정으로 덮는다. 사회 속에서 봉인되었던 나의 느낌의 덩어리들이 녹는다. 나와 한강이 만나는 순간이다.

 

이번에 나와 만난 한강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정신분석으로 인한 5년여의 기간, 그동안 알고 있던 ‘나’를 조각으로 해체하는 고통과 그것들을 주섬주섬 모았던 기간이다. 나의 시선은 나도 몰랐던 많은 낯선 나를 지켜봐야 했다. 어둠과 빛, 생명과 파괴가 공존했던 기간이다. 그 흩어진 시선들 사이에서 나의 내면과 조응하는 한강을 보았다. 한강과 나의 깊은 내면은 맞닿아 있었다. 바람과 함께 격동적으로 퍼져갔던 한강의 장면들과 동시에 그 무질서한 감정의 테두리 위에 어느새 새로운 구조의 틀이 살짝 앉아 응축되고 있었다. 시간 속에 흐르는 한강은 하나의 음악일까? 한강은 나의 내면의 리듬에 따라 진동하고 움직이는 듯하였다.

 

7여년 동안 한강을 걸었다. 이번의 한강은 그 중 3-4년 동안 나와 조응한 분절된 시간들의 모임이다. 조합된 시간들이 모인 시간, 그리고 공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강과 나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강은 멀어지고 넓어진다. 시간과 공간의 여백이 무한하게 확장하는 듯하다. 그 감당할 수없는 역사적 긴 몸이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사진으로 표현되는 나의 시각은 아직 거기에 닿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도 그 무한한 한강의 긴 몸과 나의 작은 몸이 만나는 꿈같은 순간을 상상한다. 오늘도 그 순간을 그리며 한강을 걷는다. 한강은 여느 때와 같이 앞에 있고 또 흐르고 있다.

 

이현권

이현권

<개인전>

2017 ‘서울, 한강을 걷다’(2014~2017) (팔레드 서울 갤러리)

2014 ‘서울, 한강을 걷다’ (유나이티드 갤러리)

2013 ‘1년’ (갤러리 그림손)

2011 ‘서울, 한강을 걷다’ (국민일보 갤러리)

2011 ‘서울, 한강을 걷다’ (갤러리그림손)

이외 다수의 단체전.

<논문>

2011 “사진과 정신분석” 한국정신분석학회 학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