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4-13] 망각, 기억-없는-신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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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망각, 기억-없는-신체>전
전시일정: 2015.12.04(Fri) ~ 2015.12.13.(Sun)
전시장소: 팔레드서울 1F 2F B1

<망각, 기억-없는-신체>전

망각과 기억의 패러독스: 망각은 기억을 불러온다.

<망각. 기억-없는-신체>는 개인과 공동체의 망각들과 기억들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망각 혹은 기억의 일반적인 모습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망각들과 기억들은 어디서나 일상을 가득 채운다. 김빠진 사이다처럼 밋밋하거나 지나치게 사적이다. 반면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강렬한 기억과 망각이다.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기억을 양화(quantification)할 수 있다면, 강렬함의 원인은 바로 기억의 순수한 강도일 것이다. 어쩌면 그 선명함의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때문에 기억은 늘 조각난 파편들이다. 왜냐하면 모든 기억들이 다 선명하지 않은 것처럼, 기억의 강도가 그리고 그 선명함이 모든 기억들에 일반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파편으로 조각난 기억은 강렬하게 순간순간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의식에 말을 건다. 그리고 그것은 이해될 수 없기에 느껴지며 또한 감정을 불러온다. 그래서 강렬한 기억은 너무나 기쁜, 너무나 두려운, 너무나 슬픈, 너무나 놀라운, 너무나 혐오스런 감정들과 더불어 각기 다른 것으로 구분된다. 기억의 강도는 감정의 강도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기억이 파편적인 것이 아니었더라면 죽음과 탄생, 그리고 생명에게 ‘영원한 되돌아옴’이란 없었을 것이다. 온전한 기억들의 무한한 연쇄야말로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에게는 끝없는 불행이었을 것이다. 늙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 시불라(Sibulla)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망각은 므네모시네를 살아있게 하고 뮤즈를 존재하게 한 원인이다. 망각이 므네모시네의 딸들인 무사이(Musai)를 예술의 아홉 신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사이는 이야기의 논리적 연관성 저 멀리에서 기억의 파편들을 엮어낸 느낌들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기억은 망각과 하나이다. 망각은 단순히 기억하지 못함이나 혹은 기억의 사라짐을 뜻하지 않는다.

망각의 강도는 기억에 비해 전면적이다. 기억은 수천억 신경세포들의 불타오르는 열기에 의존하지만 불타오를 만큼의 높이를 넘어서지 못했더라면 결코 그 어떤 것들도 불타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직 소수의 선택된 세포들만이 그렇게 불타오르기에 나머지 세포들은 망각의 강도에 봉사하는 것이다. 기억의 강도는 망각의 강도들 틈에서 겨우 머리를 내민다.
기뻤던 기억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참담한 기사들로 도배된 매일 매일의 뉴스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망각은 비관적이다. 망각은 슬픔과 회한, 혐오스러움과 두려움의 감정과 하나이다. 만일 그런 감정들이 너무나 강렬해서 감당할 수 없을 때면 망각은 최고의 강도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곳에서 기억은 꼭꼭 숨는다. 그럼에도 그것이 기억을 지우는 것은 아니기에 더욱 더 끔찍한 기억이 언젠가 내 앞에 유령처럼 나타날지 모른다는 걸 예고한다. 삶을 살면서 우리는 망각을 위한 수없이 많은 종류의 노력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일부러든 아니면 모르는 사이에든 망각의 세기는 커진다.
그래서 우리의 <망각, 기억-없는-신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과 망각을 더욱 냉소적으로 대한다. <기억-없는-신체>는 기억이 완전히 지워진 좀비의 몸이지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망각이 기억을 강렬하게 해준 것이므로 <기억-없는-신체>란 오히려 기억으로 채워진 몸이며 또한 슬픈 몸이다.
지난 해 4월의 끔찍했던 기억은 우리들의 마음에서 사라져버린 듯하다. 그리고 95년의 그 일도, 03년의 그 일도, 그리고 80년의 그 일도, 더 먼 날의 일들도, 그리고 우리들 각자의 더 많은 일들도. 그 일들은 우리의 망각에 내맡겨져있다.
그러나 망각인 <기억-없는-신체>는 감춰진 슬픔이고 절망이다. 망각을 기억으로 치환하려는 우리에게 지금 여기로 불러올 그것들의 강도는 강렬하다.
남아있는 우리를 위한 무게
<망각. 기억-없는-신체>의 작품들은 남아있는 우리를 위해 마련된 무게를 보여준다.

잔(殘): 망각이 진행되는 방식
김성수의 만질 수조차 없는 <로렐라이(Loreley)>는 무언의 절망이다. 눈은 꽃에게 멈춰있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에게 어서 오라고 달콤한 말을 건넨다. 그렇다 해도 아름다움에게 욕망이란 추함이다. 말을 잃은 고요함이다. 완전히 건조된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으며, 그것은 더러운 손이 다가가기에는 너무도 순결하다. 그러나 멈춰 설 수 없는 우리의 욕망은 결국 미세한 입자가 돼버릴 아름다움을 손에 쥔다. 순수한 없음을 마주하는 그 강렬한 망각의 작동은 그에 합당한 기억의 강렬함을 쏟아낸다. 정체 모를 미세한 감각들은 잠시 은폐되었던 후회와 뒤섞여 우울함이 된다.
한승구의 설치물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의 은폐 프로세스를 직시한다. <mirror mask _ projection mapping>은 얼굴로 변해가는 가면을 보여주거나 가면으로 변해가는 얼굴을 보여준다. 그는 가면과 얼굴을 선언적으로(disjunctively) 배치한다. 이것 혹은 저것, 가면 혹은 얼굴 모두 가능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가면이 아니며 얼굴이 아닌, 말하자면 회귀적으로 반복되는 투사의 논리에 의해 더 이상 양자를 구분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흔히 우리가 믿고 싶은 ‘내 마음의 진정성’인 얼굴은 가면의 이상한 논리로 더 이상 자기 동일성을 붙들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표상들로서 기억과 망각의 프로세스로 대체된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은 꽃잎처럼 생긴 그 입을 벌려 그런 우리를 자극하고 앞에 불러 세운다. 그런 다음 얼굴을 더욱 더 내밀라고 유혹한다. 그리고 우리의 망각을 제어하면서 인간다움의 기억을 활성화시키려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에서 나는 보이지 않으며 희미해진다.

도(悼): 슬픔을 기억하다.
망각이 슬픔인 것처럼 추도는 예견된 기억이다. 이혜인의 <눈 먼 그리기_20분>과 <맹목적인 사랑을 위한 가면>은 슬픔의 추상성을 부정한다. 그래서 더없이 솔직하다. 슬픔은 고통과 절망의 한 무리임을 직접적인 경험에 내맡겨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망각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 그리고 그렇기에 기억이 얼마나 더 강렬하게 망각을 해체시키는지 보여준다. 그녀는 기약 없는 붙들려 한다. 흐릿한 바다로 빨려 들어간 잠수사들의 20분을 페인팅으로 대체한다. 숨 막히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보이지 않는, 기억이 없는 얼굴들을 수없이 그리고 또 그린다. 그렇게 그려진 22장의 얼굴들은 이곳으로 불려나와 슬퍼하는 공동체의 저린 기억들로 남는다.
유비호는 더 크고 둥근 슬픔을 말하고자 한다. <바람의 노래>과 <바다×소녀>는 구체적이지 않은 거대한 절망과 또한 그것에 엮인 슬픔을 지시한다. 바람은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지나가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녕 알 수는 없듯이, 사라진 것들에 대한 슬픔, 망각에 대한 절망을 초자연적인 힘에 맡겨 조상들의 영혼처럼 노래가 되어 되돌아온다. 그의 작품들은 되돌아갈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운명과 같은 행위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절절한 슬픔과 절망의 빚을 대속하게 한다.

존(存): 남은 자들을 위한 기억의 무게
하태범과 김재범은 기계적 망각을 다룬다. 그들의 이야기는 사회적이며 공동체의 감수성을 지향한다. 그들은 미디어 기계가 작동시키는 면밀하고 정확한 망각의 전략을 시뮬레이션한다. 우리 시대의 미디어가 그렇듯이 말이다. 하태범의 <yemen>과 <playing war games 4>는 인간의 실존적인 아픔과 고뇌를 삼켜버리는 글로벌 미디어의 작동을 자신만의 특유한 ‘흰색 사물들’로 정지시킨다. 그는 미디어 기계의 권력이 지닌 그 크기만큼 망각의 억압이 비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시 미디어 기계를 끌어들이고 복제하고 촬영한다. 공포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흰색 사물들’은 아픔과 고뇌, 혹은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되었던 그 진실과 마주하라고 우리에게 손짓한다.
김재범은 <태양아래 모든 것(Everything under the Sun)>에서 사진의 존재론적 일면, 즉 기계적인 것으로 오인하는 수많은 인간적 흔적들을 말끔히 지워낸다. 렌즈를 돌리고 셔터를 누르며, 현상하고, 인화하며, 또한 보정하는 모든 사진의 절차를 구글의 무지막지한 서버에 드나드는 데이터들과 아름답고 소프트한 기계들의 메커니즘으로 대신하게 한다. 분산되어 중심을 상실하고 표백된 사진들은 1995년과 96년 그리고 2003년 ‘그곳들’을 부감한다. 사진들은 거기 그 장소성마저 삭제함으로써 망각의 슬픔 대신 기억의 무게를 일깨운다. 위도와 경도의 숫자들로 표시될 아무런 인간적 흔적이 없는 제로존(Zone Zero). 그곳에서 이제 남아 있는 자들의 망각이 어떤 것임을 보여준다.

기획: 프로젝트 아메바 (이재준_한의정_윤영규)
글: 이 재 준(미학)